끄적끄적 독서노트

권여선-레몬

오후의 체셔캣 2019. 12. 28. 12:31

 

 

 

레몬

권여선


"그의 삶의 갈피 갈피에도 의미 같은 것이 있었을까. 아니, 없었겠지.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삶에도 특별한 의미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삶에도, 언니의 삶에도, 내 삶에도.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거라고. 무턱대고 시작되었다 무턱대고 끝나는 게 삶이라고."    -P.12 中에서


"어떤 삶은 이유 없이 가혹한데, 그 속에서 우리는 가련한 벌레처럼 가혹한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하 중략) 이상하게도 내가 앞으로 어디를 찾아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가 분명해졌다. 내가 살아갈 방향도 정해졌다."  -P.145 中에서 


 2002년 여름에 한일 월드컵의 열기로 온 국민이 들떠 있을 때 여고생인 열아홉 살의 너무나 예뻤던 해언이 공원에서 시신으로 발견되고 밝혀지지 않은 채 17년의 세월이 흐른다. 당시 용의자는 자동차에 피해자와 함께 드라이브를 했던 신정준은 알리바이가 있고 그 모습을 본 목격자인 치킨집 배달 알바생 스쿠터를 몰던 한만우가 유력한 용의자가 되지만 피해자와의 관계의 접점이 없어서 증거부족으로 풀려나게 된다.

  그 후 사건은 미제로 남지만 피해자 가족과 가해자 용의자 가족들의 삶과 그 비극에 얽힌 사람들의 삶은 달라져버렸다. 세 명의 여성 화자가 나와서 이야기하지만 죄에 대한 대가를 받은 사람은 없고 누구의 삶도 평온하지 못했다. 물론 죄를 지은 범죄자들의 삶이 더욱 가혹하길 바랐지만 이 세상이 그렇지 않을뿐더러 책 속에서조차 그렇지 않았다.

 정말 이름대로 가는 것인가?

'한 많은~'이라는 별명에서조차 한이 많을 것 같은 한만우는 그렇게 삶에서 사라지고 피해자 가족의 삶은 산산이 무너진 채이고 죗값을 받지도 않고 짐승 같은 가해자들은 뻔뻔스레 잘 살아간다.


상큼한 레몬을 상상하고 펼쳐 들었으나 레몬 껍질의 씁쓸함을 남기고 덮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