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오래 준비해온 대답
오래 준비해온 대답
김영하
"떠나기로 마음먹은 후, 나는 천천히 집 안의 모든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먼저 책들을 헌책방에 내다 팔기로 했다. 책을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책을 팔자니 속이 쓰렸다. 그러나 언제까지 저 줄어들 줄은 모르고 오직 늘어나기만 하는 무시무시한 책들을 껴안고 살 수는 없다. 우선은 지난 오 년간 한 번도 들춰보지 않는 책, 그리고 앞으로도 보지 않을 책들을 골라냈다. 읽었으나 아무 감흥도 받지 못한 책들도 그 위에 얹었다. 고대 그리스의 수사학 학교에서는 좋은 연설에 다음 세 가지가 필수적이라고 가르쳤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든가 웃기든가, 아니면 유용한 정보를 줘라. 내 서가의 책들에도 그런 기준을 적용했다. 나를 감동시켰거나 즐겁게 해주었거나 아니면 필요한 정보를 갖고 있는 책들은 살아남았다. 그 세 가지 중에 단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책들은 다른 운명을 찾아 내 집을 떠났다." -P.32 中에서
; 이사할 때 처음엔 인터넷서점의 중고로 싸게 내놓았지만 이내 팔리지 않고 사실 도서관에 기증하는 것도 생각을 했는데 이는 내가 빌려본 책들이 너무 더러워서 말이죠. 커피나 물과 기름 얼룩들과 귀지와 코털로 추정되는 물질까지 보여서 기겁하게 만들어서 코로나로 책을 잘 빌리지도 못하던 터라서 내 책엔 이물질이 없어서 그 책들과 교체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해봤지만 저렇다고 하니 그것도 포기 상태로 그냥 폐지 처리가 되어버렸겠죠? 어디서나 너희의 명복을 빈다. 내가 잘못이란다. 순간의 선택으로 너희를 사버린 날 용서하렴. 나무들에게도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ㅠㅜ
"도시에서는 방의 불을 꺼도 완전히 캄캄해지지 않는다. 희미한 불빛이 불멸의 정령처럼 떠돌며 유약한 인간의 영혼 주위를 맴돈다."
-P.174 中에서
; 지금 사는 곳의 단점이 옆집 개와 층간소음으로 책에 집중을 할 수가 없어서 책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서 읽고 있는 중이랍니다. 감정 없이 쉬지 않고 몇 페이지씩 읽고 있는 터라 폐활량을 실험하는 중이네요. 왜 2년을 채우고 이사를 간 건지 궁금했었는데 이유를 짐작하는 것들이 차고 넘치는 것이 무엇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지 원. 아파트의 환한 불빛들이 거의 빛공해 수준이라서 블라인드를 쳐도 다 새어들어와서 예전이 친구 중에 암막 커튼 이야기를 하는 소리를 듣고 전엔 흘려들었는데 이번엔 절실하게 느껴지네요.
"Memony lost" (잃어버린 것들을 기억하라) -P.297 中에서
; 살면서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기엔 자기 전이 좋네요. 단 내가 아는 모든 양을 다 세어도 잠들지 못하는 수가 있으니 잡념을 버리는 것에 집중할 것!
첫 책을 좀더 의미심장한 걸로 고르려했지만 뭐 보기 편한 여행기가 제맘 편하게 하는덴 최고라서요.
새해엔 모두들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바랍니다.